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라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나고 죽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구나 서산대사(1520~1604)
- 해인사 법전스님 다비식이 끝난 후 (2014년 12월 27일)
불교의 전통 장례의식, 다비
어느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요?
모든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맞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정한 이치입니다.
부처님도 죽음에 있어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길을 걸으며 수많은 중생들을 만나 설법을 하시길 45년,
마침내 80세가 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3개월 후 나는 열반에 들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충격과 슬픔에 빠진 비구들이 소리를 칩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우리들은 이제 아주 망하리라!”
부처님의 말씀은 담담하였습니다.
“걱정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아라.
하늘이나 땅이나 사람이나 한 번 나서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
한 번 모인 것은 떠나는 법이지.
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이 목숨은 오래가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3개월 후 부처님은 쿠시나가라에 이르러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장례는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 즉 다비로 행하였습니다.
- 1. 법주사 쌍림열반상 2. 서울 안양암 쌍림열반상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리라
연화대에 불길이 화르륵 일어납니다.
돌아가신 스님은 이제 다시 모습을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복받치는 그리움을 누르고 목탁을 두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젖은 목소리가 산자락을 휘감아 돌고, 긴 여운은 가슴을 울립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합니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흔들림 없이 고요한 곳, 번뇌와 고통이 없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불이 되고 바람이 되어 흩어집니다.
육신을 불에 태워 한 줌 재로 만든 후 사방으로 뿌리는 다비야말로
우리가 원래 있던 자리,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는 의식입니다.
- 2010년 3월 13일 송광사에서 거행된 법정스님 다비식.
추모와 그리움의 자리
“참으로 수행이 대단한 분이셨지요.”
“열반에 드시는 순간까지 자비의 씨앗을 뿌린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예의를 갖추어 배웅하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조문을 온 스님들은 상주 노릇을 하는 스님들과 맞절을 하며
돌아가신 스님에 얽힌 추억과 인연을 나누고 상심한 마음에 위로를 건넵니다.
머리 허연 보살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주름 가득한 손을 가슴께 모읍니다.
냉기에도 아랑곳없이 땅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없이
스님 가시는 길을 꼿꼿이 지키는 불자도 있습니다.
숙연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영결식에도
스님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이 애틋하게 이어집니다.
모두들 간절한 마음으로 스님이 편안히 열반에 드시길 기원합니다.
- 대흥사 천운스님 다비식 2010년 7월 18일 대흥사에서 열린 천운스님 다비식에 앞서 대흥사 스님들이 상주가 되어 조문 온 스님들과 맞절을 하고 있다.
청정한 경계를 향한
색색의 행렬
부처님이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고
길 위에서 설법을 하시다 길 위에서 열반에 드셨듯이
우리도 멈추지 않고 주어진 길을 걸어야 합니다.
때로는 길 아닌 길을 걷다가 큰 시련을 겪기도 하며
때로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지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걷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다비장으로 가는 길은 아직 육신이 남아 있을 때 걷는 마지막 길입니다.
스님의 육신을 모시고 걷는 마지막 길입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길입니다.
색색으로 펄럭이는 만장 행렬엔 추모의 글이 구구절절 담겨
바람결에 그리운 마음을 날려 보냅니다.
이 길의 끝에 다비장이 있습니다.
연화대 위에 법구를 올리다
연꽃송이가 피어올랐습니다.
화장을 위해 쌓은 장작더미가 만든 아름다운 연꽃 한 송이.
그래서 이 장작더미를 연화대라고 부르나 봅니다.
연꽃은 부처님의 꽃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씩 걸을 때마다 땅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태자를 귀히 떠받쳐 주었습니다.
더러운 흙탕물에서 피어나지만
맑고 깨끗한 성정을 고운 꽃잎과 향기로 피워 올리는 연꽃처럼
스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세속의 풍진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깨달음의 꽃을 피워 올렸습니다.
운구해 온 스님의 관이 연화대 안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부대중이 합장하며 간절히 기원합니다.
“스님, 서방정토에 왕생하여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나소서.”
- 해인사 법전스님 다비식 거화 2014년 12월 27일. 종이 연잎을 정성껏 붙여 만든 거대한 연꽃송이 모양의 연화대가 생전 스님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불꽃, 열반에 들다
그리움은 남은 이들의 몫일 뿐
이젠 정말 스님을 보내드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횃불을 든 스님들이 연화대 주변을 빙 둘러 섰습니다.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합니다.
산천이 침묵하고 날아가던 새조차 날갯짓을 멈춘 것 같은 순간
마침내 연화대에 불이 붙습니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봇물 터지듯 사대부중이 입을 모아 소리칩니다.
가슴에 담아 두었던 차마 못 다한 말도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에 함께 태웁니다.
밝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은
고통과 번뇌의 사슬을 끊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환희의 춤을 춥니다.
끝없이 울려 퍼지는 염불 소리가 돌아가신 스님이 열반에 들었음을 함께 기뻐하는 듯합니다.
걸림 없는 본래의 모습으로
회향하다
밤새 타오르던 불꽃은 새벽녘에 이르러 수그러듭니다.
곱디곱고 한없이 가벼운 가루가 된 스님은
이윽고 바람결에 실려 산천에 뿌려질 것입니다.
스님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걸림 없는 본래의 모습으로 회향하셨으니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탑돌이를 하듯 연화대 주변을 돌던 이들도
맑은 염불 소리로 연화대 곁을 지키던 젊은 스님도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스님이 남기신 가르침은 가슴 속 작은 불꽃으로 담아서 돌아갑니다.
- 월정사 월면스님 다비식 산골
- 뼛가루는 사방으로 뿌린다. 자연에서 온 존재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