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古宅)’은 풀이해보면 ‘지은 지 오래된 집’이란 뜻이다. 그러나 한국의 고택은 단순히 오래된 집이라고만 할 수 없다. 우리의 땅과 자연에 자리 잡아 몇 백 년을 내려오며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고택은 조선말에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까지 100여 년 동안 작은 상흔으로 많이 소실되고 사라졌다. 그래서 이 지난한 시간을 견뎌내고 남아있기에 더욱 가치있는 유산이다. 한국의 고택에는 유형과 무형의 우리의 삶이 담겨 있다. 또한 고택에는 사람들이 살아온 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오롯이 살아있다. 그곳에는 고고하게 솟아있는 솟을 대문부터,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사랑채, 아내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할 안채, 학문과 마음을 닦던 별당, 정자까지 곳곳에는 삶의 의미가 전해지고 있다. 세월을 넘어 지켜온 한국의 고택을 감상하며 잊혀져가는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느껴보자. 옛것의 소중함과 시간에 새겨진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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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강릉 선교장은 18세기 초 효령대군의 11세손 무경 이내번(1703~1781)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안동권씨 어머니와 충주에서 강릉으로 내려온 이내번은 처음에 경포대 주변에서 살다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선교장은 처음부터 한 번에 모두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시기를 달리하며 세워지고 확장되었지만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1700년대 초 이내번이 지은 안채를 시작으로, 그 후손에 의해 1815년에는 사랑채인 열화당과 활래정 정자가, 1800년대 중반에 서별당과 외별당이, 마지막으로 1920년에 동별당이 지어졌다. 300년은 족히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집을 감싸고 있고, 10개가 넘는 건물, 120칸에 달하는 선교장은 단순히 집이라고 하기엔 크고 아름다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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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곳이다. 작고 소박하지만 잘 정리된 이곳을 거닐다보면, 학식과 덕망 높은 집에서 태어난 신사임당의 품위가 저절로 느껴지게 한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건축사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됐다. 이 곳 몽룡실(夢龍室)에서 율곡 이이(李珥)가 태어났다고 한다. 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하여 문성사(文成祠), 사랑채, 어제각(御製閣),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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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지은 집이다. 이언적은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 홍문관, 춘추관, 시강원, 양사, 이조, 병조 등 청요직을 거쳤다. 하지만 1531년 김안로(1481~1537)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경주의 자옥산으로 들어와 지금의 독락당을 지었다. 자옥산 골짜기의 자계천 줄기에 자리잡은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사랑채인 옥산정사 독락당을 중심으로 안채인 역락재, 행랑채인 경청재,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던 별채 공수간, 사당, 어서각, 정자인 계정이 있다. 보물 제 41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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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최씨 고택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아, 문간채 · 사랑채 · 안채 · 사당 · 고방으로 구성되어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 11월 화재로 사랑채와 별당이 터만 남아있다가, 현재 사랑채는 복원되었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 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다. 그러나,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용암 고택’이라고도 불리는데, 용의 정기가 스며든 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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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 탑동파의 종가집으로 1700년대에 처음 지어졌다. 안채·사랑채·북정 등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려 조성된 양반사대부 주택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안동시 법흥동 영남산(嶺南山)의 동쪽 기슭 넓은 대지위에 위치하고 있다. 뒤꼍의 산과 북정앞을 흐르는 계류등의 자연환경을 잘 살려서 집을 배치하였다. 또한 연못과 화단을 곁들여 아름다운 저택을 완성하였다. 이 고택은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주변의 자연환경과 건물을 교묘하게 조화시키면서 사대부저택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여기에 독특한 구조 및 수법과 전통양식이 보존되어 있어서 전통주택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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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변씨 간재 고택은, 조선 중기 학자인 간재 변중일의 종택과 정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고택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18세기에 걸친 건축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간재 고택은 종가의 품위와 규모를 잘 갖추고 있으며 자연 지형에 어울리는 사대부가의 가옥으로 가치가 높다. 이 고택은 특별한 점이 있다. 사대부가의 공간 영역까지 구비한 단독 종택이란 점인데, 한국 종가 가옥에서 흔하지 않은 방식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활 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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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택은 퇴계 이황(1501~1570)의 종택으로 1929년 퇴계의 13대 사손이 옛 종택의 규모를 참고로 하여 지금의 터에 새로 지었다. 이 집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ㅇ’ 자형으로, 대문과 정자, 사당 등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퇴계 이황의 종택은 사대부집의 공간 영역을 갖추고 있고, 솟을 대문과 정자 등 품위를 지니고 있다. 종가로서 전통 문화를 유지하고 있어서 해마다 시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안동 지역 선비 집안의 가풍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가옥이면서 동시에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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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금적산 아래 자리잡은 선곡 마을은 화순 최씨 집성촌이다. 흔히 선우실이라 부르는 선곡 마을은 학이 알을 품는 지형이라 하여 마을에 무거운 것을 올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집도 사랑채만 기와로 올리고 안채는 초가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보은 최태하 가옥은 흙과 돌을 섞어 가며 쌓은 담장이 집을 둘러싸고 있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안채의 ‘숭정기원후오임진(崇禎紀元後五壬辰)’이란 상량문에 의해 조선 고종 29년(1892)이라는 정확한 건축연대를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옥의 구성은 바깥마당에서 사랑마당으로, 바깥대문을 거쳐 가운뎃 마당으로, 중문을 거쳐 안마당으로 각각 ㄱ자로 꺾으면서 들어가게 되어 우리나라 전형적인 양반 가옥의 공간율동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말기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고택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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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군 깊은 산골에는 조선 후기 강직한 선비의 자취가 담긴 고택이 남아있다. 양평 이항로의 생가이다. 조선 시대 마지막 유학자라 불리는 이항로는 스승없이 독학으로 뛰어난 학문의 경지를 이룬 천재적인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과거도 외면하고 벼슬도 마다한 채 양평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자연을 벗삼아 생을 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 정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이 고택이다. 이항로 생가는 정남향에 안채 15칸과 사랑채가 딸려있다. 안채에는 ‘노산정사(盧山精舍)’라고 쓰인 편액이 붙어 있다. 이항로의 부친이 지은 200년이 넘은 고택이다. 사랑채에 앉아보면 용문산에서 발원한 수입천 계곡이 가로질러 흐르고 산들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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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몽심재(夢心齋)는 조선 후기 전북 지방 상류 가정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 고택이다. 이 가옥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호랑이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데 앞의 안산은 호랑이의 꼬리 형상을 대신하고 있다. 집 뒤로 보이는 산은 아미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초승달 형태로써 여자 후손에게 복이 많을 형상이라고 전해진다. 이 고택은 건립 연대가 정확하다. 숙종 20년에 박동식(1753~1830)이 산 아래의 따뜻한 터를 잡아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몽심재’란 당호는 고려시대 충신 송암 박문수가 조선 시대 관직에 참여하라는 이성계에게 거절의 의미를 담아 지은 시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충절을 지키는 주인의 기개만큼이나 오래된 고택의 아름다움의 정취가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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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雲鳥樓)’는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구례 오미리 마을 한가운데 있다. 이 고택은 금가락지가 떨어진 명당이란 뜻의 ‘금환락지’로,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이라 주택지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는 중국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글귀로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으로, 이 집을 지은 유이주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유이주는 낙안 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닌 무관이었다고 한다. 그가 이 집을 짓기 위해 7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는데. 이렇게 정성을 다해 완성된 운조루는 지금까지도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으로 꼽힌다. 이 고택에는 의미 있는 물건이 놓여진 장소가 있다.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헛간이 사이이다. 이 집에 오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인 뒤주를 먼저 찾았다고 한다. 쌀을 가져가는 사람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가져갈 수 있게 외진 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남도의 대표적인 자선가 집안의 가풍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