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
한국인에게 사찰은 성스럽고 장엄한 불교 수행 도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로와 위안을 주는 공간이다. 또한 우리에게 사찰은 그 자체로 역사와 문화를 품은 살아 숨 쉬는 문화재이다. 한국의 사찰은 산, 강,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같은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그곳에는 놓쳐서는 안 될 것들이 많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도량, 가람의 배치부터 곳곳에 존재하는 종교적 의미를 담은 법구, 그리고 사찰 경내 예절까지 유형, 무형의 문화재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찰은 단순히 수행공간에 머무는 게 아니라 불교 문화를 응축한 보고라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사찰부터 깊은 산속 작은 도량까지, 아름다운 사찰을 돌아보며 불교문화를 감상해보자. 그 속에서 부처와 하나됨을 위한 우리의 오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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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8경중 하나인 오봉산 자락에 위치한 낙산사는, 통일신라시대 671년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의 전신사리를 모셔와 세웠다고 전해진다. 낙산사는 불교인에게 큰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 사찰로 꼽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낙산사의 풍광은 자연과 불상이 빼어난 조화를 이룬다. 사찰 정상에는 해수 관음상이 동해를 굽어보고 있고, 절벽 위에 세워진 홍련암은 동해의 푸른 바다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또한 홍련암에는 관세음 보살이 모셔져 있어 성스러운 아름다움도 더하고 있다. 낙산사는 높이 뻗은 소나무가 동해의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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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 금강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에는 건봉사가 자리잡고 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때 원각사로 창건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 건봉사로 개명이 되었다고 한다. 한 때 금강산의 3대 사찰중 하나로 한때는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큰 절이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때 모두 불에 타버려 주춧돌의 흔적만이 옛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전쟁 당시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인 ‘불이문’ 뿐이다. 독특하게도 불이문은 기둥이 4개인 문이 아니라 차라리 집에 가깝게 지어져있다. 여기엔 금강저가 기둥에 새겨져있는데, 한국 전쟁때 맞은 총탄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건봉사에는 고찰로서의 위엄을 보여주는 곳이 있다. 바로 부처 진신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부도전이다. 부처의 진신치아 사리는 스리랑카에 3과 건봉사에 8과가 있어 세계적으로 11과에 그치는 보물이다.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는 소나무 숲속 건봉사를 거닐며 부처가 꿈꾼 세상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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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는 부산의 심장이라 불리는 금정산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범어(梵漁)는 ‘하늘 나라의 고기’라는 뜻이라고 하니, 범어사는 금정에 살고 있는 하늘나라의 고기와 같은 절인 셈이다.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1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경남의 3대 사찰로 꼽히고 있다. 사적기에 따르면, 창건 당시에 문무대왕의 명으로 대규모의 불사를 하여 요사 360방, 토지 360결, 소속된 노비가 1백호로 국가의 대찰이었다고 한다. 또한 범어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원효대사도 이곳에서 수도했고,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고, 그리고 3.1운동 때에는 범어사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네 개의 기둥으로 세 개의 출입구를 가진 일주삼간(一株三間)의 일주문도 독특하고, 커다란 바위 옆으로 긴 전각을 이룬 독득한 배치도 인상적이다. 범어사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곧게 뻗은 대나무 숲,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고찰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복잡한 부산 시내를 보며 호젓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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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토함산에 위치한 불국사는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부처님의 나라’를 세우기위해 당시 궁궐의 건축양식을 도입해 지은 대찰이다. 그 유래를 찾아보면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때인 751년에 김대성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 역대 고금 창기>에 따르면 이 절은 528년에 세웠다고 하니, 천년의 역사를 이겨낸 사찰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사찰 경내 곳곳을 둘러보면 신라 문화의 높은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가 자하문을 지나야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공간 배치는 물론이고, 부처가 바라보는 대웅전 앞마당에는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석가탑, 다보탑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일찍이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불국사의 구름다리나 돌탑, 돌을 새기고 나무를 맞물린 기교는 동쪽의 여러 절로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는 표현에 저절로 공감하게 된다. 불국사의 아름다움은 자연과 만나야 더욱 빛을 낸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의 풍경, 여름 장마비에 젖은 석가탑의 모습, 붉은 단풍과 조화를 이루는 청운교, 흰 눈에 둘러쌓인 겨울 불국사의 풍경까지 계절마다 그 모습이 다채롭다.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불국사 경내를 따라 부처의 나라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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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은 기암절경으로 이루어진 금산 정상 아래 자리잡고 있다. 638년 원효대사가 초당을 짓고 수행하다 관음보살을 친견한 후 초당의 이름을 보광사라 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양양의 낙산사,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알려져 있는데,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보리암이 위치한 ‘금산’ 역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 소원이 이루어지면 온 산을 비단으로 둘러주겠노라 약속을 했기에 산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보리암에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배어나온다. 푸른 남해바다를 향해 서있는 관음보살이 영험함을 느끼께 하고, 전각들이 절벽을 따라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삼층석탑 역시 사찰만큼 신비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본래 삼층석탑은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태후가 인도 월지국에서 가지고 온 돌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보리암 가는 길은 금산의 독특한 바위는 물론, 바다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점점이 떠있는 남해의 섬들과 금산의 기암괴석의 조화는 놓치기에 아까운 장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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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는 해남 달마산 아래에 우리나라 육지의 절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절의 창건 연대나 역사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사적비에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의조화상이 꿈에 나타난 금인의 이야기를 듣고,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세운 절이 미황사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해서 ‘미’자를 넣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자를 딴 것이라 한다. 이 사찰은 남쪽의 작은 금강산처럼 화려한 산세가 인상적인 달마산을 배경으로 서있는데, 바위 능선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사찰이지만 잊지못할 아름다운 사찰로 기억되곤 한다. 산자락과 잘 어울리는 위치에 알맞은 규모로 자리잡은 절터와 대웅전의 편안함, 게나 거북 등이 새겨진 독특한 대웅보전 기둥 초석과 대웅보전이나 응진전 안벽과 천장의 18세기 중반 벽화들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땅끝 마을의 고즈넉함과 화려하지는 않지만 웅장함을 선사하는 절집의 분위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풍경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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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는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가면 만나는 모악산에 위치해 있다. 모악산은 한국의 곡창지대라 불리는 김제와 만경평야를 발아래 두고 있어서 생명을 키우는 산이라 여겨지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불교 미륵 사상이 도입된 이래 호남지방에서 모악산을 중심으로 미륵사상이 개화했다. 금산사의 미륵전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금산사에서는 천년 고찰 산사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경내에 국보와 보물만 11점이 있는데, 그가운데 미륵전이 가장 유명하다. 미륵전은 국내 유일의 3층 목조 법당으로 법당 안의 삼존불의 높이가 11.8m에 이를 만큼 웅장하다. 그래서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 산호전, 장륙전이라고도 한다. 넓은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만나는 사찰의 웅장한 아름다움은 사계절마다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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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는 한반도의 땅끝마을 해남 두륜산에 위치해 있다. 서산대사는 두륜산을 , 만년동안 허물어지지 않을 땅인 ‘만년불패지지(萬年不敗之地)’라며 극찬하였는데, 산의 능선이 마치 부처가 누워 있는 와불(臥佛)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흥사는 어떠한 외세의 침입이나 굶주림, 돌림병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세 만큼이나 다도해를 조망하는 아름다운 풍광이 사찰을 더욱 특별한 곳으로 만들어준다. 창건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기록을 따르고 있는데, 임진왜란의 승병장이었던 서산대사 이후로 사찰의 규모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대흥사는 한국 불교사에서 조선 불교 중심도량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성불의 서원을 가진 스님들이 정진하는 청정 수행 도량이다. 대흥사에는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길이 있다. 바로 매표소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장춘동길이다. 단풍나무, 벚나무, 소나무, 삼나무 등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봄에는 신록과 만개한 꽃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우거진 녹음이,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겨울에는 동백이 아름답다. 사찰까지 가는 길이 오랫동안 찬란한 기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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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는 계룡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사찰이 위치한 계룡산은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따르면 새로운 도읍지로 신들의 땅으로 점친 곳으로 영험한 땅이라 여겨진 곳이다. 그래서인지 갑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끝이지 않는다. 갑사는 계룡갑사, 갑사, 갑사사, 계룡사 등으로 불려왔는데, 통일신라 시대 화엄종 십대 사찰의 하나였던 이름있는 절이다. 갑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 간다'고 해서 갑등의 이름으로 갑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름대로 하면 첫째가는 절이라 할 수 있다. 갑사는 사찰로서의 위엄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세종 6년(1423)에 일어난 사원 통폐합에서도 제외될 만큼 일찍이 이름이 났던 절이었으며, 세조 때에는 오히려 왕실의 비호를 받아 '월인석보'를 판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유재란시 전소되었으며, 선조37년(1604)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찰 주변에는 경승지들인 용문폭포, 수정봉, 천진보탑, 군자대 등이 모여있다. 특히 남쪽 계곡은 이른바 9곡을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수려한 경관과 성스러움이 함께하는 갑사의 풍경을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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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군 태화산 아래 마곡사가 위치해 있다. 기록에 따르면 640년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자장이 절을 완공한 후 설법했을 때 사람들이 '삼'[麻]과 같이 빽빽하게 모여들었다‘고 해서 마곡사라 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신라 무선대사가 당나라 마곡보철 선사에게 배웠기 때문에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마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마곡사는 창건 이래 충청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로 이름을 떨쳤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는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마곡사를 당시 가장 부유한 사찰로 언급했고,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직접 행차해 ‘영산전’의 친필 편액을 내릴 정도로 충청도의 중심 사찰이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한때 항일 독립 운동가 김구 선생이 일본군 장교를 처단하고 잠시 피신해 승려생활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마곡사는 산 속이라기 보다는 계곡 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절 앞에 태극 모양으로 휘돌아 나가는 물길 양쪽으로 절집이 서있는데, 한쪽은 기도와 수행의 공간으로 소박하며 다른 한쪽은 기도의 도랑으로 근엄하다. 마곡사는 거대하거나 웅장하지 않지만 귀품있는 모습으로 큰 생각을 품게 하는 편안한 공간이다. 산과 강의 조화로움 속에서 명찰의 분위기를 만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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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상황사에 위치해 있다. 개심사의 ‘개심(開心)’은 마음을 열어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사찰에 들어서면 소박한 아름다움에 저절로 마음을 열게 되니 뜻대로 이룬 곳이 아닐까 싶다. 이 사찰은 백제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개심사 사적기>에 의하면 ‘진덕여왕 5년, 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가 서산 개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의 진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고려 후기 웅진 출신의 수선사 제10세조였던 혜감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는 논의도 있다. 사찰은 백제 시대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문화재로 채워져 있다. 다포양식의 정수로 손꼽히는 대웅전을 비롯해 보물인 영산회괘불탱화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 백제문화의 진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고즈넉한 사찰의 풍경 속에서 마음을 닦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개심사는 한 생각만으로 언제라도 마음을 바꾸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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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산성 동문 쪽 가파른 산기슭에 망월사가 서 있다. 망월사는 남한산성 안에 있는 10개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로 망월암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화엄경, 금솥 등을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곳이라 하겠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해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이후에 복원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법당 자리는 영화로웠던 옛 망월사 규모와 건물 배치를 짐작하게 한다. 대웅보전 우측에는 눈길을 끄는 13층 석탑이 있다. 이 탑은 사리탑으로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으로부터 직접 모셔온 진신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망월사는 남한산성의 아름다운 풍경속에 도심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소중한 사찰이다. 일주문의 뒷면에 새겨진 ‘자항문’이란 글대로, 자비의 배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의미가 사찰 곳곳에 숨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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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사는 복잡한 서울의 도시에서 사찰의 고즈넉함을 선사하는 곳이다. 우이동 북한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사찰은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명찰이다. 이 사찰이 세워진 기원에 대해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신라 경문왕 2년에 도선국사가 명산 승지를 두루 답사하다가 삼각산에 이르러 산세가 절묘하고 풍경이 청수한 이곳에 천년후 불법이 재흥하리라 예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신통력으로 옆에 우뚝 서있는 큰 바위를 반으로 잘라 한 쪽 면에다 30여척에 달하는 관세음보살상을 주장자로 새긴후, 이 절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이 석불은 높이 20m 암벽에 8.43m의 크기로 새겨놓았는데 그 규모로도 이미 절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이후 도선사는 1903년 혜명스님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보수하였고, 1904년에는 국가 기원도량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962년부터 청담 대종사가 호국참회불교를 제창하면서 이 석불이 영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참회기도도량으로 자리잡고 오늘에 이르렀다. 도선사는 수도 서울에 위치한 사찰로써 살아있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호국 도량으로서의 품격도 느낄 수 있는 사찰이다. 무엇보다 계절마다 색다른 북한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