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경도
- 안불사안불사|함경남도 안불사 극락보전 전경,극락보전 불상과 후불탱화,극락보전 내부 빗반자,극락보전 내부 소란 반자,민적당 정면사진|1/1/1,1/1/2,1/1/3,1/1/4,1/1/5|극락보전은 조선후기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규모는 작지만 연꽃무늬 화려한 조각장식이 남아있다.^극락보전에는 아미타여래 삼존 불상이 모셔져 있다.^비스듬한 천장 빗반자에는 승려, 봉황, 학을 타고 피리와 악기를 연주하는 두 명의 동자승, 두꺼비를 낚고 즐거워하는 촌부 등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천장은 네모난 모양에 귀틀로 장식된 소란반자로 되어있다. 귀틀의 교차 지점에 연꽃과 운학이 화려하게 그려져있다.^민적당은 1843년에 안불사가 중건될 때 세워졌다.
- 양천사양천사|함경남도 양천사 만세루 전경,함경남도 양천사 대웅전 전경,함경남도 양천사 대웅전 내부 전경,함경남도 양천사 대웅전 내부 빗반자 별화,함경남도 양천사 대웅전 내부 빗반자 별화(무악도),함경남도 양천사 만세루 전경,함경남도 양천사 만세루 범종|1/2/1,1/2/2,1/2/3,1/2/4,1/2/5,1/2/6,1/2/7|양천사는 함경남도 고원군 영천리 반룡산에 위치해 있다. 현재 북한 국보문화유물 제 113호이다. 양천사라는 절 이름은 산 뒤의 돌샘에서 조(粟)가 나오고 물이 나와서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함경남도지』에 따르면 1677년 묘련대사가 개축했다고 한다. 현재 대웅전, 만세루, 극락전이 남아있다.^대웅전은 잘 다듬질된 화강암으로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으로 세운 다포계 팔각 지붕 건물이다. 1636년 고쳐지은 건물이다.^대웅전 내부에는 불단 위에 아(亞)자 형의 화려하게 장신된 닫집이 달려있고 천장 중앙은 네모난 소란천장이고 주변은 비스듬한 빗천장으로 설치되어 있다. 단청은 금단청으로 기하학적 도형이 반복되는 형식이다. 주불로 석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양천사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대웅전 내부의 별화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세태 풍속을 담은 여섯 장면의 그림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단청 그림 중 가장 빼어난 것은 좌우 옆면 빗천장에 그려진 무악도이다. 무악도에는 불로장생의 상징인 복숭아를 쟁반에 받쳐 든 두 선인을 중심으로 20여 명의 악사와 무인들이 북과 징, 가야금과 비파 등을 연주하며 춤추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천정에 그려진 별화는 8세기 스님들의 생활 단면을 보여준다.^만세루는 현재 북한에 남아있는 사찰 누각 가운데 가장 크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려한 단청이 눈길을 끌며, 대들보를 비롯한 여러 곳에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용, 앞으로 내달리는 범과 서 있는 사자 등의 단청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양천사종은 1683년(숙종19)에 주조됐으며, 높이 1.15m, 무게가 373kg이다. 이 종은 원래 함흥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2000년대 중반 양천사로 다시 옮겨왔다.
- 개심사개심사|함경북도 개심사 전경,함경북도 개심사 대웅전 전경,함경북도 개심사 만세루 앞면,함경북도 개심사 관음전 전경,함경북도 개심사 산신각 전경|1/3/1,1/3/2,1/3/3,1/3/4,1/3/5|함경북도 명천군 보촌리 칠보산의 내칠보 기슭에 있다. 북한의 국보문화유물 제 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심사는 ‘함북금강’으로 불리는 칠보산 내칠보 중에서도 절승으로 이름난 개심대에 자리 잡았다. 개심사는 함경북도에 현존하는 사찰 중 최대의 사찰이다. 1948년 대웅전을 보수할 때 용마루에서 ‘발해 선왕 9면 병오 3월15일 용강성 석두현 해성사 금강곡 칠보산 개심사 창건 추대원화상 목수팽석’이라고 쓴 종이를 넘은 함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개심사가 826년 대원화상이 창건한 절임이 밝혀졌다.^대웅전은 자연석 허튼층쌓기로 높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계 팔각 지붕집이다. 단청과 기둥 장식 문양이 매우 화려하다.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셨고, 업경대 등 여러 불구들이 있다.^만세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팔작 지붕이다.^관음전 편액^산신각 등 전각들이 균형미가 있고 주위환경과 잘 어울려서 고찰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 자강도
- 원명사원명사|자강도 원명사 전경,자강도 원명사 백화전 전경,자강도 원명사 극락전 전경,자강도 원명사 칠성각 전경|2/1/1,2/1/2,2/1/3,2/1/4|자강도 희천시 유중리 묘향산 기슭에 있다. 986년 구피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하지는 않다. ‘구피대사’란 이름은 사계절 개가죽 옷을 입고 다녀 지어졌다고 한다. ‘원명사’는 늘 둥근 달이 밝게 비치는 곳에 있는 절이란 뜻을 담고 있다.^앞면 7칸, 옆면 2칸의 직사각형 평면 건물로 팔작집이다. 내부가 여러 칸으로 구성된 것이 다른 곳과 차이가 난다.^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인간의 수명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모시는 전각인 칠성각이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시대 후기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 만수암만수암|자강도 만수암 전경,자강도 만수암 대웅전 전경,자강도 만수암 관음전과 주변전경,자강도 만수암 산신각 독성전 칠성전 전경|2/2/1,2/2/2,2/2/3,2/2/4|만수암은 자강도 희천시 향천리에 있다. 묘향산 부용봉의 남쪽 중턱에 산세가 아주 험하고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17세기 이전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관음전, 병월방 등이 있고, 누각이 ‘ㅁ ’자 형으로 둘러져 있다.^지금의 대웅전은 1930년에 중수된 것이다. 높은 축대위에 지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관음전, 명월방, 누각 등이 둘러져 있다.^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인 관음전이다.^한 채의 건물을 여러 칸으로 막아 칠성전• 영산전• 독성전• 산신각을 구성하였다.
- 평안도
- 법흥사법흥사|평안남도 법흥사 원경,평안남도 법흥사 극락전 전경,평안남도 법흥사 삼화상각 외부,평안남도 법흥사 장경각 처마와 공포|3/1/1,3/1/2,3/1/3,3/1/4|평안남도 평원군 신성리 강룡산 기슭에 있다.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서 인용된 김부식의 글에 법흥사는 터만 남은 절로 묘사되어 있어 고려시대에 한동안 폐사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123년에서 1125년 사이에 크게 중축되었고, 다시 1759년에 중건되었다. 6·25전쟁 때 일부 불탔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법흥사는 특히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전국에서 승병을 모집하고 이곳에서 승군을 조직한 호국 사찰로 유명하다.^법흥사에는 현재 극락전, 장경각, 삼화상각, 승방이 있는데 모두 조선 시기에 고쳐지은 건물이다. 주전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조선 시대 후기에 새로 지어져 오늘에 이른다.^나옹·무학·지공 대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18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장경각은 1401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의 특색을 보여준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전각이다.
- 보현사보현사|평안북도 보현사 대웅전 전경,평안북도 보현사 대웅전 앞면,평안북도 보현사 관음전 전경,평안북도 보현사 영산전 앞면,평안북도 보현사 만세루와 대웅전 측면 전경,평안북도 보현사 해탈문 앞면|3/2/1,3/2/2,3/2/3,3/2/4,3/2/5,3/2/6|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기슭에 있는 유서깊은 사찰로 한국 5대 사찰 중의 하나로 꼽힌다. 보현사는 986년에 창건되었고 1042년에 중건한 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보수, 중건 되었다. 김부식이 지은 「보현사사적비」에 의하면 1042년 승려 탐밀의 조카이자 제자인 굉곽이 243칸 규모의 보현사를 세웠는데, 당시의 전각 수는 24개였으며, 대중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보현사는 31개 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말사가 112개였다고 전해진다.^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건물의 규모가 웅장하면서도 정교하며 매우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현재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관음전은 1042년에 처음 세워진후 1449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본체 정면과 측면 앞쪽은 겹처마이고, 나머지는 홑처마이다.^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배집이다. 본래 보현사 동쪽 약 500m 지점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에 옮겨 놓았고, 1875년에 다시 지었다.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을 많이 담고 있다.^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앞은 2층 뒤는 1층으로 되어있다. 1979년에 고려시대 건축 양식으로 복원한 것이다.^해탈문은 고려 시기에 처음 세워졌다. 우측에는 사자를 탄 문수보살동자상이, 좌측에는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 양화사양화사|평안북도 양화사 전경,평안북도 양화사 해탈문 전경,평안북도 양화사 천왕문 전경,평안북도 양화사 대웅전 전경,평안북도 양화사 명부전 전경|3/3/1,3/3/2,3/3/3,3/3/4,3/3/5|양화사는 평안북도 태천군 상단리 향적산 중턱에 있다. 발해 때인 872년에 처음 세워졌고, 고려 때인 922년 조선 때인 1461년에 고쳐 지었다. 양화사는 서북지방에서는 묘향산의 보현사 다음 가는 큰 가람이었으며 ‘보국사’라고도 불렀다. 향적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이 감싸고 있고 절 주변에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우거져 산사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해탈문은 자연석을 허튼층쌓기로 축조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전면에 「관서교종향적산양화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천왕문은 1656년에 지어졌다. 양화사의 천왕문은 다른 사찰과 달리 사천왕상을 세우는 대신 사천왕 불화를 걸어 놓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양화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은 높게 축조한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합각집이다. 현재의 대웅전은 1879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조선 말기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빗천장에 그려진 무악도가 인상적이다.^명부전은 대웅전 동쪽에 위치하며 서남쪽 방향으로 서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 천주사천주사|평안북도 천주사 천주루 전경,평안북도 천주사 보광전 전경,평안북도 천주사 천주루 전경,평안북도 천주사 천주루 향일헌 전경|3/4/1,3/4/2,3/4/3,3/4/4|천주사는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동대의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약산 동대를 비롯해 이 지역은 김소월 시 「진달래꽃」의 무대가 된 ‘관서 8경’의 하나로 손꼽던 곳이다. 천주사의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다. 1624년 이괄의 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천주사에서 의거하였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철옹비」에 의하면 1684년 평안도 관찰사 신익상, 운산 군수 이휘 등이 이절에서 동북쪽으로 약 30미터 지점에 있는 영변 철옹성을 수리하면서 쇠락한 천주사를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천주사는 현존하는 북한 사찰 중 단청이 가장 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보광전은 1722년에 다시 지어졌으며 그 이후 보수가 있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기본적으로 그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바깥 7포, 안으로 11포의 화려한 공포를 얹은 합각집이다.^천주루는 연변부사가 천주사를 세우면서 왕이 다시 연변에 오게 되는 경우 숙소로 쓸 수 있게 지은 건물이다. 절에서는 보기 드물게 궁전의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천주사는 영변의 중요한 군사적 위치로 인하여 철옹성과 함께 군사적으로도 중시되었는데, 지금도 천주루에는 ‘청북유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부근에 무기고 터가 있다.^천주루의 양옆으로는 각각 다락건물이 부속되어 있다. 향일헌은 천주루 동쪽에 있는 부속건물로, 마루 깔린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 금광사금광사|평안북도 금광사 전경,평안북도 금광사 대웅보전 전경,평안북도 금광사 백화전 전경,평안북도 금광사 청운당 전경,평안북도 금광사 만세루 전경|3/5/1,3/5/2,3/5/3,3/5/4,3/5/5|금광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송장면 금광리의 석숭산 기슭에 있다. 창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418년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481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지금의 건물들은 1846년 화재로 전부 불탄 것을 1847~1851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금광사는 금강사라고도 하였다. 지금도 만세루에는 ‘석숭산금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금광사는 가람의 규모가 큰 조선시대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찰이다.^대웅보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계 팔각집이다. 내부 천장에는 황룡, 연꽃, 연잎을 가득히 그려넣었는데 생동감이 넘친다. 내부의 불단 위에는 닫집 대신 대들보 아래에 연꽃 조각을 달아 보개처럼 처리하였다.^백화전은 요사체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익공 홑처마의 팔작 지붕 기와집이다. 백화전은 원래 뒤쪽으로 건물이 이어진 ‘ㅁ ’형의 구조였다. 앞뒷면 가운데 세 칸에는 툇마루가 한 칸씩 달려 있다. 남쪽에는 큰 부엌이 있고, 나머지는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청운당은 요사체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집이며 홑처마 지붕이다.^만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 누각이다. 만세루는 지형의 차이를 이용하여 전면에서 보면 누각이나 후면은 단층인 건물이다. 전면으로 출입하지 않고 좌우에 계단을 놓아 ‘우회진입’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석숭산금강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 황해도
- 월정사월정사|황해남도 월정사 전경,황해남도 월정사 극락보전 전경,황해남도 월정사 수월당 전경,황해남도 월정사 명부전 앞면|4/1/1,4/1/2,4/1/3,4/1/4|월정사는 구월산 4대 사찰 중 현재 구월산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찰로 조선 초기 절 배치와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월정사 현판이나 「재령군지」에는 846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되어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월정사 사적비에 따르면 월정사는 처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보수되고 개건되었는데, 1650년부터 1871년까지 다섯 차례나 보수되었다고 한다. 구월산은 경치가 빼어나 ‘서해의 금강’으로 불렸으며, 특히 9월의 단풍이 아름다워 구월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극락보전은 높이 약 1미터의 정교한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치마 합각집이다.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고려 말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내부에는 잘 짠 불단 위에 금동 아미타불을 모셨으며,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을 올렸다. 극락보전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건축물이다.^수월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 머리에 짜맞추어 댄 공포는 봉황새와 황룡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에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 건물이다. 앞면은 겹처마로, 뒷면은 홑처마로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초기 사찰에서 흔히 쓰는 기법이다. 명부전은 연꽃봉오리와 석류꽃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 귀진사귀진사|황해북도 귀진사 전경,황해북도 귀진사 극락전과 심검당,황해북도 귀진사 주악루|4/2/1,4/2/2,4/2/3|귀진사는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숭덕산 기슭에 있다. 「황해도향토지」에 의하면 귀진사는 12세기 중엽에 성수사 소속의 암자로 창건되었으나, 16세기 초 보우 스님이 대장경각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면서 독립된 사찰로 중창하였다고 한다. 귀진사는 일제강점기의 31본산시대에는 성불사의 말사였다. 귀진사는 극락전을 본전으로 하여 주악루, 심검당, 칠성각, 향로전 등의 건물과 7층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극락전과 주악루, 심검당만이 남아있다.^극락전은 16세기에 고쳐 지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안팎으로 9포로 짜올린 합각집이다. 1928년 극락전 천장에서는 「용감수경」, 「법화경」, 「화엄경」, 「십지론」, 「수륙문」, 「42장경」, 「부모은중경」 등 불경판목 2,000여 매가 발견됐다. 그 대부분은 일제가 약탈해 갔고, 일부 관목은 현재 묘향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주악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익공양식의 맞배집이다. 주악루는 앞면에서 보면 누각이지만 절 마당에서 보면 단층이다.
- 평양
- 광법사광법사|평양시 광법사 원경,평양시 광법사 대웅전과 8각5층석탑,평양시 광법사 해탈문,평양시 광법사 천왕문 앞면|5/1/1,5/1/2,5/1/3,5/1/4|평양시의 경관이 수려한 대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광법사는 372년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전진의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본래 광법사에는 여러 전각이 있었으나 수차례 재해를 입고 복구 되기를 반복하였고, 북한은 전쟁 시기인 1952년에 전소된 것을 1991년에 조선시대 건축 형태를 그대로 복원하였다. 북한은 광법사 복원 후 1965년부터 양강도 삼수군 중흥사에 있던 승려 양성 및 교육기관인 ‘불학원(佛學院)’을 이곳으로 옮겼다. 광법사는 평양 시내 인근에 소재한다는 접근성과 북한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복원사찰이라는 점, 한국 불교 전래 초기의 사찰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평양 방문시 주요한 순례 사찰로 꼽히고 있다.^복원된 광법사는 남북 자오선을 축으로 하여 중층의 대웅전을 남향에 두었다. 대웅전 앞에는 새로 조각된 8각 5층 탑을 세웠고, 마당 좌우에는 동승당과 서승당을 마주보게 배치하였다. 대웅전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정면, 측면 3칸씩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2층 전각으로 조선시대 후기 양식을 따랐다.^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안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안치하였다.^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안에 사천왕상을 배치하였다.
- 동금강암동금강암|평양시 동금강암 원경,평양시 동금강암 본전 전경,평양시 동금강암 툇간 우물천장|5/2/1,5/2/2,5/2/3|동금강암은 평양시 순안구역 오산리 담화산에 위치해있다. 본래 평안남도 평원군 신성리에 있는 법흥사의 말사로, ‘동금강사(東金剛寺)’로도 불렸다. 숲이 울창하고 기암괴석과 협곡이 아름다우며, 동쪽에 있는 금강산에 위치한다고 하여 ‘동금강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동금강암은 고려 초기인 955년에 창건 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3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동금강암은 높이 50여 미터 되는 절벽 바윗돌 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량에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머물렀으며, 사명대사도 머문적이 있다고 전해진다.^동금강암중건비에 절의 유래에 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한 늙은 스님이 아침저녁으로 부처에게 불공을 드릴 쌀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었다. 어느날 늙은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바위 아래 굴 입구를 보니 쌀이 줄줄 바위 입구를 따라 나오고 있었다. 그는 하늘이 주는 덕이라고 생각하고 끼마다 적당한 양의 쌀을 가져다가 밥을 지어 불공을 올렸다. 그러던중 쌀바위 소문을 들은 한 낯선 스님이 이 암자에 와서 지팡이와 끌을 가지고 그 굴을 넓혔다. 그랬더니 갑자기 천지가 칠흑같이 되어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쌀바위에서 기둥 같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낯선 중을 삼켜버렸다. 이때부터 그 굴에서는 쌀대신 한줄기의 좋은 샘물이 서서히 흘러나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외국의 한 사신이 이곳을 보고 신령스러운 절승지라고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 정릉사정릉사|평양시 정릉사 전경,평양시 정릉사 보광전 처마와 공포,평양시 정릉사 용화전 전경,평양시 정릉사 극락전 전경|5/3/1,5/3/2,5/3/3,5/3/4|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에 위치해 있다. 정릉사는 광법사와 함께 북한이 복원한 대표적 사찰이다. 정릉사는 고구려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지은 절이라고 전해진다. 1973년~1975년 사이 김일성 종합대학 등이 주관하여 동명왕릉을 비롯한 일대의 무덤과 유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사지가 발견되어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절터가 정릉사지로 밝혀진 것은 발굴과정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와편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고구려의 고유한 절 건축 양식으로 복원하였다. 복원된 정릉사는 8각7층 석탑을 중심으로 중금당• 동금당•서금당이 있고, 중문과 회랑이 그것을 둘러싼 1탑 3금당식의 절이다.^보광전은 복원된 정릉사 전각 가운데 가장 큰 15m의 2층 건축물이다. 석가여래좌상을 본존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입상이 협시로 안치되었다.^동금당인 용화전에는 미륵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서금당인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입상이 협시보살로 봉안되어 있다.
- 개성
- 관음사관음사|개성시 관음사 전경,개성시 관음사 대웅전 측면,개성시 관음사 관음굴 전경|6/1/1,6/1/2,6/1/3|현존하는 개성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인 관음사는 개성특급시 박연리에 있다. 970년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별대덕(別大德)’, ‘별화상(別和尙)’으로 칭송받던 법인국사 탄군이 굴 안에 관음보살상 한 쌍을 놓고 ‘관음굴’이라고 불렀고, 그 후 관음사가 지어졌다고 한다. 1393년에 크게 확장하였다가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것을 1646년에 중창하였고, 지금의 건물은 1797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5채의 당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승방만이 남아있다.^대웅전은 1.7m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절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겹처마를 댄 우진각 지붕을 이었다. 대웅전의 창호는 꽃살문 조각 창호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평양시의 경관이 수려한 대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광법사는 372년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전진의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본래 광법사에는 여러 전각이 있었으나 수차례 재해를 입고 복구 되기를 반복하였고, 북한은 전쟁 시기인 1952년에 전소된 것을 1991년에 조선시대 건축 형태를 그대로 복원하였다. 북한은 광법사 복원 후 1965년부터 양강도 삼수군 중흥사에 있던 승려 양성 및 교육기관인 ‘불학원(佛學院)’을 이곳으로 옮겼다. 광법사는 평양 시내 인근에 소재한다는 접근성과 북한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복원사찰이라는 점, 한국 불교 전래 초기의 사찰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평양 방문시 주요한 순례 사찰로 꼽히고 있다.
- 영통사영통사|개성특급시 영통사 전경,개성특급시 영통사 보광원 전경,개성특급시 영통사 중각원 전경,개성특급시 영통사 숭복원,개성특급시 영통사 보조원 전경,개성특급시 영통사 경선원 본전과 대각국사 부도|6/2/1,6/2/2,6/2/3,6/2/4,6/2/5,6/2/6|개성특급시 용흥동 오관사 기슭에 위치해 있다. 영통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승복원 자리에 건립한 절이다. 승복원은 태조 왕건이 증조 할아버지가 살던 암자를 확장해 직접 지은 절이다. 일찍이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인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자주 참배하였던 대찰이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이곳에서 출가하여 천태종을 열었으며, 입적한 후에는 그의 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 16세기 무렵 화재로 소실되어 오래도록 폐사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의 사회문화 교류 협력이 활성화됨에 따라, 폐사 500여 년 만인 2002년 11월부터 북한과 대한불교 천태종이 함께 복원사업을 시작해 2005년 10월 31일 복원을 완성했다.^보광원은 전통사찰의 대웅전 격인 전각으로 영통사에서 중심 건물이다. 2층 구조의 지붕 아래 닫집을 만들어 그 아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모셨다.^중각원은 대각국사 의천과 제자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사」에는 이곳에서 50여 차례의 대규모 강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승복원은 일명 행궁(行宮)이라고도 한다. 태조 왕건의 원당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나중에는 사찰을 찾은 왕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회랑으로 사방을 막아 경계를 철저히 했다.^보조원은 관음전의 별칭으로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경선원은 영통사 뒤편 산 중턱에 있는 대각국사 화상을 모신 곳이다. 대각국사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진 총지사에서 열반했는데 대각국사의 유언을 따른 제자들이 영통사에 잠시 법구를 안장했다가 다비한 다음 사리탑인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경선원 바로 앞에는 그 때 세운 부도가 그대로 서있다.
- 강원도
- 마하연마하연|강원도 마하연터 묘길상 마애불과 석등|7/1/1|묘길상 마애불은 내금강 만폭동의 높이 40m 미륵대절벽에 새겨져 있다. 이 부처상은 앉은 높이 15m, 너비 9.4m로 우리나라 마애불 가운데서 가장 크고 빼어난 작품 중의 하나다. 고려 중기 이전의 조각으로 추정된다.